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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왕녀와 누더기 기사

0. 프롤로그




 10년만에 돌아온 고국의 수도는 용의 침략을 받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엔그리실은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세상이 떠나갈 듯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들의 의복은 깨끗했고, 드러난 손은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러워 보였으며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의 신체 손상을 입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엔그리실을 흘끔거리며 바라보았다. 그야 엔그리실 쪽에서 먼저 사람들을 바라보았으니 시선이 되돌아오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사람들은 엔그리실의 지저분한 망토에 닿고 싶지 않다는 듯 거리를 두었고 그녀의 왼뺨에 길게 난 상처를 경멸 담아 흘끔거렸으며 그녀가 등에 짊어진 대검을 보고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만 엔그리실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사람들의 반응으로부터 아직 이 도시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읽어냈다. 지저분함을 꺼린다는 건 이 도시의 위생 관념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상처 입은 이를 경멸한다는 건 이 도시에 용의 침략으로 상처입은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뜻한다. 패검한 여인을 보고 당황한다는 건 이 도시가 여인에게까지 무기를 쥐어 줄 정도로 절박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엔그리실의 어머니는 분명 훌륭한 왕이다. 엔그리실은 10년 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용의 침략을 받고 무너진 도시를 수없이 마주했지만, 엔그리실이 마주한 도시 중에서 이만큼이나 적은 피해로 용을 회유시켜 돌려보낸 사례는 사실상 없다시피했다. 최소한의 피해로 백성을 지키는 것이 왕의 본분이라면 그녀의 어머니는 분명 훌륭한 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 위업이 비겁함과 옹졸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엔그리실은 이를 바득 갈며 왕성을 향해 곧장 걸었다.



 "신분을 밝혀라."

 "출정식을 보러 왔다. 이 출정식만큼은 신분과 관련 없이 누구라도 구경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수상한 자를 왕성에 들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하겠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들여보낼 수 없다."

 "수상해? 지저분한 망토를 두르고 등에 검을 차면 수상하다고 보는 건가? 왕성에 침략해 온 용이 그런 꼬락서니로 들이닥치기라도 했어?"



 엔그리실이 코웃음을 치자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험악한 얼굴로 창을 들이밀었다. 엔그리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경비병의 코앞에 무언가를 들이밀었고, 그것을 확인한 경비병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신분을 밝혔으니 이제는 들어가도 되겠지?"

 "다, 당신. 아니, 설마, 진짜로…?!"

 "네놈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나를 방해하지 마라. 여기서 도망쳐서 상부에 보고하는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 그게 경비병의 본분이니까."



 머뭇거리던 경비병은 결국 엔그리실에게서 등을 돌려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비병이 국왕에게 엔그리실의 귀환을 알린다면 순식간에 왕성 전체가 비상 사태에 빠지겠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으므로.


 엔그리실은 방해꾼이 없어진 성문을 가로질러 출정식 장소를 향해 걸었다. 출정식을 구경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이들은 그녀 말고도 제법 많았으므로 방향을 가늠하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제대로 타이밍을 맞춰 왔는지, 출정식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10년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용의 침략은 필연이었으나, 침략으로부터 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은 왕으로서의 의무이다. 제2왕녀 이에나르 라 페르넨은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였으며…."



 과연 자기 의사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백치가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들먹이며 제 발로 사지에 향했을까? 엔그리실은 열다섯 살에도 다섯 살 어린아이보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던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십 년이 지났으니 동생 또한 스물 다섯이 되었겠지만 그녀의 정신은 세월의 선물과 저주로부터 비껴 간 채 영원히 어리기만 할 터였다. 본래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물론 용에게 빼앗긴 왕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비록 이 나라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하여 뼈아픈 선택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왕녀는 짐의 곁에 남은 유일한 왕족이며 짐은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녀를 용으로부터 되돌려 받고 말 것이다."



 누가 들으면 제2왕녀 이에나르가 외동딸이라도 되는 걸로 오해하겠다. 엔그리실은 이를 바득 갈며 소매 안쪽에서 길쭉한 접이칼을 꺼냈다. 등에 멘 대검은 지금 당장 쓸 생각이 없다. 이 대검은 무기라기보다는 사실상 그녀를 지키기 위한 보호구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녀는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몇몇 사람들은 짜증을 내며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어지간한 성인 남자조차 내려다볼 정도로 장신인 데다가 등에 대검을 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체격이 큰 엔그리실이 마주 노려보자 그들은 기가 죽어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짐은 제2왕녀 이에나르의 부마 칼레스 루 페르넨에게 왕녀를 구출할 의무를 지우겠다. 그대는 짐의 신하로서 짐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으며, 이에나르의 반려로서 아내를 구할 의무가 있다."



 옥좌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출정식을 내려다보는 국왕과, 바닥에서 무릎을 꿇은 채 왕의 명령을 전달받는 사내가 엔그리실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에나르가 혼인하였다는 사실은 머나먼 소문으로나마 전해들어서 알고 있다. 백치인 데다가 [신력]이 없어서 왕으로서의 힘을 가지지 못한 이에나르가 왕실에 도움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충분한 신력을 지닌 자와 혼인해 신력을 지닌 왕손을 낳는 것뿐이다.


 물론 이에나르가 혼인을 원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내와 관계를 맺어서라도 신력을 지닌 왕손을 낳고 싶어하는지, 만약 그녀가 신력을 지닌 왕손을 낳지 못한다면 그녀의 입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겠지만 말이다.


 엔그리실은 십 년 전 왕국에서 추방된 이후로 그 점이 언제나 신경 쓰였다. 왕족이라는 지위가 있으니 신변의 안전은 보장되겠지만,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버려지거나 이용될 게 뻔한 그녀의 존재가 언제나 눈에 밟혔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국왕은 검을 들지도 않고 전투 명령 한 번 내리지 않은 채, 그저 용이 요구하는 대로 이에나르를-


 

 "물론 그에 걸맞은 대가 또한 준비해 두었다. 만약 그대가 이에나르를 구출한다면, 그 공을 높이 사 그대에게 왕위 계승권을…."

 "딸을 거래의 도구로 쓴 걸로도 모자라 그 계승권조차도 빼앗을 작정인가, 무능한 왕이여!"



 그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던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엔그리실은 모든 인파를 뚫고 나와 왕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었다. 옥좌에 앉은 왕은 서늘한 시선으로 엔그리실을 바라보았으며, 무릎 꿇은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달려온 국왕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국왕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다가 엔그리실을 보고 흠칫 멈춰섰다. 아무래도 성문의 경비병이 자신의 의무를 충분히 다한 모양이었다. 물론 이제는 너무 늦었지만.



 "너는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 엔그리실."

 "왕성으로부터의 추방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지껄일 거면 집어치워. 나는 신력을 가진 왕족이며 여전히 이 왕국의 제1왕위계승자다. 아무리 당신이 왕이라 해도 그 사실만은 부정하지 못해!"



 엔그리실. 페르넨 왕국의 제1왕위계승자. 그 이름을 들은 군중들 사이에서는 아까보다도 더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0년 전, 성정이 잔혹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를 들어 국왕이 왕국 바깥으로 추방시킨 제1왕녀는 '붉은 왕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한 몸에 샀다.


 그녀가 국왕과의 정치력 다툼에서 밀려나 쫓겨나고 말았다는 온정적인 해석을 내놓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한데, 왜냐 하면 그녀의 손에서 죽어나간 병사들과 하인의 수가 실제로 일백 명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엔그리실이 왕이 되어 더 많은 이들을 죽이기 전에 그녀를 추방시킨 왕의 혜안을 오히려 칭송했다.


 그런 그녀가 왕성에 돌아오다니…. 사람들은 경악에 가득 찬 눈빛으로 엔그리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여인의 몸인데도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도 반 뼘은 더 큰 키에, 등에 멘 대검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늠름한 체구는 공주라기보다는 기사나 군인에 더 가까웠다. 저 대검으로 지금껏 사람을 수백 명쯤 도륙하고 다녔다 해도 납득이 갈 만한 모습이었다.

 


 "판단력 잃은 백치 딸을 희생양으로 넘긴 것까지는 좋다 쳐. 그걸로 지금 당장은 백성도 구하고 칭송도 받겠지.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지만 국가를 위한 것이라 변명하며 부모로서의 한탄을 곁들이면 동정심도 살 수 있겠고. 그런데 말이야. 위협하면 피 한 방울 묻히지도 않고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학습한 용이 또 찾아오면 그때는 무엇을 바칠 생각이지? 바칠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면 당신 몸뚱이라도 바칠 생각인가?"

 "……."

 "아니지, 일단 용을 왕국 바깥으로 떠나보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용을 토벌할 작정이로군. 그 노력의 일환이 이 출정식일 테고. 그런데 말이지, 나는 자기 아내가 용에게 바쳐지는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겁쟁이 따위는 신용할 수 없거든? 당장 눈앞에 용이 쳐들어왔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가 원정을 떠난다고 뭐 달라질 것 같은가?"



 엔그리실은 번뜩이는 눈으로 왕을 노려보며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갔다. 추방당해 홀로 조용히 살아갈 예정이었던 그녀가 이 나라에 다시 발을 들인 이유는 왕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저 자는 처음부터 희생밖에 몰랐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손 닿는 범위에 있는 자들 중 가장 약한 존재를 억지로 무릎 꿇려 그쪽으로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피해를 떠넘겼다.


 희생양으로 선택받지 않은 이들이야 왕의 현명함과 자애로움을 칭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엔그리실은 피로 물든 왕의 손을 본 적이 있다. 선량한 척하는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을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접이칼을 펼쳐 들어올렸다. 왕의 호위 기사들이 잔뜩 긴장한 태도로 검을 뽑아들었지만 엔그리실은 개의치 않은 채 왼쪽 소매를 걷어올렸다. 팔목 안쪽은 사람의 살점 중에서도 그나마 여리고 부드러운 편에 속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손목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흉터가 존재했고, 그 흉터들은 일반적인 자해흔처럼 가로나 세로로 베인 상처가 아니라 무언가로 '꿰뚫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건 마치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하여 낸 상처처럼 보였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도, 왕의 부마도 믿을 수 없어. 나 또한 왕족으로서 같은 왕족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언니로서 위험에 처한 동생을 구할 의무도 있다."

 "……."

 "그렇다면 내게도 이에나르를 구출할 의무가 있겠지? 의무를 행했으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도 있어야 할 테고!"



 그녀는 접이칼의 끝부분을 이용해 있는 힘껏 자신의 팔을 찍어내렸다. 사실상 팔을 못 쓰게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닐까 싶은 과격함에 군중들이 비명을 지른 것도 잠시, 그녀는 팔을 꿰뚫다시피 한 접이칼을 있는 힘껏 비틀며 뽑아냈다. 그녀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지만 칼에 관통당해 아예 구멍이 뚫린 상처에서는 대량의 피가 쏟아져 나왔고, 그 피는 마치 안개처럼 공중에 비산하더니 -



 "엔그리실 라 페르넨, 페르넨 왕국의 제1왕위계승자로서 선언한다. 내가 왕국의 제2왕녀 이에나르 라 페르넨을 구출해 오면 그때야말로 그 왕위는 내 것이다!"



 수백, 수천 개는 될 법한 길쭉한 피의 창이 순식간에 허공을 수놓았다.
 기사의 검 따위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붉은 왕녀 엔그리실이 지닌 [신력]이 일제히 왕을 향해 겨누어졌다.




 ***


 갑자기 밤이 오기 전에 쓰고 싶어져서 대충 써 버렸습니다.


 용에게 납치된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평범한 판타지물입니다. 뭔가 마지막에 좀 이상한 묘사가 있긴 했는데 제 글을 하루이틀 읽은 게 아닌 고인물 독자분들이야 뭐 제가 이런 묘사 좋아하는 거 다들 아실 테고... (귀 후비적)


 일단 첫 편 쓰는 건 재미있는데 앞으로도 이 기세로 계속 재미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여기에 써서 올리고, 충분히 분량이 모였을 때쯤 '아 이건 되겠다' 싶으면 조아라에 올리든 뭐 어쩌든 할 예정입니다. 뭐 마이너한 소설이니까 어차피 주목받지는 않겠지만 본진이 그쪽이니까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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